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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 전쟁: 샬랄> / <나라 없는 길에 관한 이야기> / <별 아래 파도 위의 집>(2022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김보년 2022. 11. 1. 14:16

릴 전쟁: 샬랄 (카르니 만델)
  감독이 말하듯, 아카이브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여기에 정치와 권력이 개입하면 당연한 명제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 〈릴 전쟁: 샬랄〉은 수천개의 필름릴을 보관한 이스라엘의 아카이브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중에는 20세기 중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자료가 있었고, 이스라엘 관계자들은 이 자료의 공개를 제한한다. 시민들의 일상을 기록한 단순한 영상도 그들에게는 불편했던 것이다. 〈릴 전쟁: 샬랄〉은 이 필름을 찾으려는 아키비스트의 노력을 보여주는 한편, 언뜻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단순한 영상의 존재 유무가 왜 그렇게 논쟁적인 문제가 됐는지 살펴본다. 나아가 영상 아카이브의 최초 생산 이후 이를 보존하고 다시 재생하는 작업이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역사적 실천임을 상기시킨다.

나라 없는 길에 관한 이야기 (웨이성 황, 아웅 묘)
  일제 강점기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과 중국으로 이주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약 3,000명의 한국인들이 대만으로 이주했으며 그중 일부는 광복 이후에도 대만에 남는 쪽을 택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나라 없는 길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지금까지 대만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이제 ‘할머니’가 된 여성들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들이다. 대만어, 일본어, 그리고 간간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30분의 러닝타임에 다 담을 수 없는 복잡한 사연으로 우리가 모르고 있던 역사를 재구성하고 상상하게 이끈다. 한 여성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티셔츠를 입고 김치를 담그며 대만어로 옛 이야기를 들려줄 때 우리는 우리가 아직 몰랐던 '우리의 이야기'가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별 아래 파도 위의 집 (라우 켁 후앗)
  구글맵이 ‘섬’으로 분류한, 물 위의 집들로 이루어진 말레이시아의 작은 마을. 이 마을에도 어린이들이 살고 있고, 이들은 빈곤이라는 조건 속에서도 학교에 간다. 영화는 눈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어린이들의 천진한 모습과 초롱초롱한 눈빛을 따뜻한 시선으로 조심스럽게 기록한다. 〈별 아래 파도 위의 집〉에서 빛나는 부분 중 하나는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리쳐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라야 하며,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교육받아야 하며, 국가와 사회의 더 많은 예산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을 자막이나 내레이션으로 직접 전달하는 대신 교실 풍경을 길게 보여주는 쪽을, 어린이들이 재밌게 (그러나 위험하게) 노는 모습을 길게 보여주는 쪽을 택한다. 이때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몇 마디 말보다 훨씬 강력한 감정적 설득력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