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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티백> / <더 보이즈 클럽> / <나는 기억한다>(2022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김보년 2022. 11. 1. 14:19

씨티백 (황선영)
  “명랑하고 밝고 분위기 메이커인, 멋있는 사람이죠.” 출연자 중 한 명인 십대 소년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쑥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는 소개를 이어 나간다. “배달만 하면서 살아요.” 출연자들은 차례로 오토바이를 타는 재미와 사고의 아찔한 순간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감독은 오래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함께 기억한다. 황선영 감독의 〈씨티 백〉은 오토바이 배달일을 하는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영화다. 출연자들의 기억 속에는 위험한 행동도 있고 명백한 불법도 있다. 어쩌면 우리도 한 번쯤 그들을 길에서 보고 얼굴을 찌푸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삶을 쉽게 판단하는 대신 우리가, 즉 어른들이 왜 저들의 사연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는지, 왜 무관심으로 저들을 더 위험하게 했는지 되묻는다. 청소년들의 밝은 웃음 앞에서 부끄러워지는 건 결국 우리들이다.

더 보이즈 클럽 (이웬 첸)
  말레이시아에서 활동하는 감독은 다큐멘터리 촬영 도중 스태프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납품’을 위해서라도 영화를 완성해야했던 감독은 가해자와 계속 같은 현장에 있어야 했고, 그러는 동안 반복적인 2차 가해를 당했다. 결국 감독은 영화를 인질로 잡힌 채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영화의 제목인 ‘더 보이즈 클럽’이 암시하듯, 감독은 사태의 원인을 단순히 가해자 한 명에게만 돌리는 대신 사회의 문제 인식 자체를 고발한다. ‘모두’를 위해 일을 키우지 말라는 제작사 대표의 조언이 그 적나라한 단면이다. 자신이 겪은 수 년 간의 괴로운 기억을 용기내어 들려준 감독 덕분에 관객은 성폭력에 관한 잘못된 인식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 다시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올해의 가장 용감한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기억한다 (페가 아항가라니)
  감독은 기억한다. ‘골람’이란 이름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가족들을 찍던, 항상 담배 냄새가 배어있던, 미군 야상이 잘 어울리던, 1978년 이란 이슬람 혁명 당시 거리에 나섰던, 그리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남자를 기억한다. 감독이 꺼낸 사진은 훼손되어 있으며, 골람을 기억하는 목소리에는 담담한 슬픔이 묻어있다. 감독의 사적 기억과 이란 사회의 공적 기억을 동시에 다루는 〈나는 기억한다〉는 일차적으로 고발의 성격을 지닌다. 이 영화는 정치범들에게 사형을 집행한 이란 정부의 만행을 용감히 고발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기억의 성격을 사유한다. 광학적 기록 매체의 시대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억이 실은 얼마나 다양한 외부 요인에 의해 간섭받고 교란되는 것인지,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