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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짧고 굵은 아시아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김보년 2021. 9. 27. 06:50

양궁소녀 / 김수림 / 2021

  중학생 수민은 어머니의 엄격하고 꼼꼼한 지도와 함께 여러 학원을 다니고 있다. 정작 수민이 제일 좋아하는 건 핸드폰 게임이지만 수민은 굳이 어머니와 맞설 생각이 없다.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학원과 학원 사이를 오가던 어느날, 수민은 집중력 향상을 위해 찾은 양궁 학원에서 의외의 재미를 느낀다.
  모두가 과열된 입시 교육과 사교육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공부는 중요하다’는 오래된 전제를 벗어난 새로운 상상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꼭 모든 학생이 공부만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나아가 ‘공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 <양궁소녀>의 이야기는 소중하게 다가온다. 30분 길이의 짧은 영화에서 수민의 미래 행보와 앞으로 닥칠 고난까지 미리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이를 어른들에게 솔직히 알리는 건강한 태도는 예상 이상의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 제목도 그렇고 '소녀'에 방점이 찍혀있지만 어머니의 복잡한 캐릭터가 의외로 좋았다.


외숙모 / 김현정 / 2020

  임신 중인 민경은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의 1주기 제사에 참석한다.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외삼촌을 그리워하며 자리에 없는 외숙모를 원망하는 동안 민경은 복잡한 생각에 잠긴다.
  <은하비디오>(2015), <입문반>(2019) 등을 연출한 김현정 감독의 <외숙모>는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 결론을 내리기 곤란한 마음의 상태를 탁월하게 포착하는 감독의 연출력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번 작품에서 감독은 가부장제에 기반한 이런저런 무자비한 말들에 갇힌 한 여성을 스크린에 등장시킨다. 이때 관객은, 주인공 민경이 그러하듯, 한정된 정보 속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녀도 분명 자신만의 사연과 할 말이 있을 것이란 사실, 하지만 그 말을 꾹 참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외숙모의 지난 이야기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부장제가 한 개인의 고유한 삶을 어떻게 억압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다.

+ 작년에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 중 한 편. 이번 기회에 상영할 수 있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