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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직원의 극장 일기 - 종로3가에서 밥 먹기 (4)
김보년
2021. 9. 28. 20:35
명동칼국수
열심히 일하다보면 때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자주 찾는 식당 중 하나가 피카디리 앞에 있는 명동칼국수다. 상호에는 ‘칼국수’라고 적혀 있지만 내가 주로 먹는 메뉴는 11,000원짜리 특보쌈정식이다. 한끼 식사로는 살짝 부담스러운 가격이라도 고기와 야채가 꽤 넉넉하게 나온다. 게다가 균형 있는 식사를 했다는 뿌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어 좋다.
이 가게의 특징은 옆 테이블 손님의 성격에 따라 가게 분위기가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면, 높은 확률로 밥과 술을 먹으며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는 어르신들을 만나게 된다. 이건 사실 명동칼국수만의 특징은 아니고 종로3가에 있는 대부분의 식당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종로의 어르신들은 시간에 관계 없이 반주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혼잡한 시간을 피해 늦은 점심, 또는 이른 저녁을 먹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높은 비율로 술에 취한 어르신들을 만난다. 이분들은 기분 좋게 취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큰 목소리로 나누시고, 나는 본의 아니게 저분들의 속깊은 생각을 엿들으며 밥을 먹는다. 사업에 성공한 아들 자랑,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 김정은과 문재인과 트럼프와 허경영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밥을 먹다보면 복잡한 일 생각은 잠시 잊을 수 있다. 다른 곳이라면 불편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이 가게에는 그런 나쁜 기억은 없다.
+ 몇 달 전 이 가게는 문을 닫았다. 지금은 다른 식당을 위한 리모델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