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서은영, 2020) 리뷰 / 2021 충무로영화제 감독주간
불편한 질문: 보라는 정말 착한 아이일까?
<고백>의 이야기는 언뜻 매우 깔끔해보인다.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진범은 밝혀지고 이 과정에서 감독은 굳이 관객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 장르 문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미 이야기의 전말을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보라(감소현)는 아버지에게 오랜 시간 가정폭력을 당했고 보라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맞은 게 아니라 술에 취해 스스로 다친 것이며, 그를 의도적으로 방치해 죽게 놔둔 사람은 사회복지사 오순(박하선)이 아니라 딸 보라였다. 또한 오순은 이미 남자가 사망한 다음 현장에 도착했으며, 이 일로 보라가 불리한 상황에 처할까봐 경찰에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경찰 지원(하윤경)은 사건을 끝까지 조사해 이 진실을 모두 밝힌다.
물론 ‘해피엔딩’이라고는 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이 결말을 받아들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관객은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주인공 보라-오순-지원에게 어렵지 않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선택과 결정을 (100%는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고통 속에 죽어간 보라의 아버지는 지독한 악당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관객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분노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나쁜 아버지가 사망했기 때문에 보라가 결과적으로 더욱 안전한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오순은 재판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상참작을 받아(아마 경찰인 지원이 유리한 증언을 해줄 것이다)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거란 기대를 할 수도 있다.
주제의 측면에서도 <고백>은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선명하고 뚜렷하게 전달한다. 먼저 감독은 가정폭력에 노출된 보라와 보라를 돕는 성숙한 어른들을 여럿 등장시켜 약자에게 손내미는 행위를 아름답게 묘사한다. 또한 보라의 가정폭력 뿐 아니라 젊은 여성에 대한 스토킹 폭력도 비중있게 다루면서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그밖에도 지원이 오순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말을 건네는 시퀀스나 경찰 선배(정은표)가 지원을 따뜻하게 응원하는 순간, 오순을 걱정하는 동료 미연(서영화)의 표정, 보라를 돌보는 오순의 어머니 등 돕는 행위의 귀중한 가치를 드러내는 장면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폭력 묘사가 적지 않게 등장함에도 <고백>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부드럽고 따뜻한 방향으로 흐르는 건 이런 연출이 큰 역할을 한다.
요약하자면 <고백>은 아동 학대와 살인, 유괴라는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친절하게 전달한다. 물론 영화에 관한 감상은 서로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관객은 적을 것이다. <고백>을 처음 본 나의 감상도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되새겨야 할 보편적 가치를 따뜻한 어조로 말하는 성실하고 솔직한 영화. 어쩌면 익숙하고 쉬운 길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의외로 이런 작품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나는 <고백>에 이상한 순간이 포함되어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다. 바로 보라가 같은 반 아이를 괴롭히는 시퀀스로 나는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이 장면이 상대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금방 잊었다. 하지만 보라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영화를 다시 생각하면 쉽게 대답하기 힘든 까다로운 질문이 찾아오고 ‘약한 타인을 돕자’는 주제로의 매끄러운 귀결은 계속 미뤄진다. 영화의 성격 자체가 바뀌는 건 물론이다.
언뜻 보라는 ‘착한 아이’의 모범처럼 보인다. 오순과 지원의 말을 잘 따르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보라에게 나쁜 인상을 갖기는 힘들다. 그런데 감독은 보라가 다른 동갑내기 친구를 괴롭히고 따돌리는 아이라는 설정을 추가한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언을 쏟아붓는 건 아니다. 대신 보라는 교묘한 거짓 연기를 통해 같은 반 아이를 속인 뒤 따돌리고 여기에서 이득을 취한다. 이는 관점에 따라 친구와 주먹다짐을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로 볼 수도 있다. 감정이 순간 폭발한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 타인을 괴롭힐 분명한 의도를 갖고 치밀한 계획까지 세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전체 분위기와 비교하면 이 장면은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보라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추측하는 과정에서 보라를 의심하게 만드는 장르적 장치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짓말 시퀀스’의 이 음습한 분위기는 완전히 봉합되지 않는 찜찜한 흔적을 남긴다.
결국 두 번째로 본 <고백>은 보라의 캐릭터와 함께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다시 다가왔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백>의 주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이 공감의 정서를 쌓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의 선한 성격에 크게 기댄다. 오순과 지원은 이런저런 잡음을 일으키지만 이들이 선한 인물이란 사실 자체는 의심하기 힘들다. 조금 덜렁대고 말썽을 일으키더라도 기본적으로 관객의 호감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캐릭터들이다.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그런 두 사람에게 쉽게 감정 이입을 하며 슬픔과 기쁨, 분노와 희망을 함께 공유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의 주제는 더 강력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보라가 저지른 나쁜 행동을 떠올리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오순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구해준 보라가 사실은 선의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위험에 처한 모든 사람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특히 아이의 경우라면 더더욱 자격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픽션에 몰입해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차원에서도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지 물으면 즉시 긍정적인 답을 하기는 어렵다. 단적으로 말해 보라가 ‘착한 아이’가 아니라 ‘나쁜 아이’라 해도 <고백>의 주제에 마음 편히 동의할 수 있을까? 또는 보라의 나쁜 짓을 기억하면서도 우리는 오순의 희생에 감동할 수 있을까?
즉, 지금 <고백>은 ‘누군가를 도와주었는데 만약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이라는 마주하기 불편하고 곤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는 중이다. 그러니 <고백>의 이후 이야기에 대해서도 어두운 가정을 할 수 있다. 만약 보라가 오순과 지원의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만약 앞으로도 보라가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을 괴롭힌다면? 이런 의심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고백>은 매끈한 봉합 작업 속에서 연대의 가치를 예찬하는 작품이 아니라 드러난 표면 아래 숨어 있던 질문을 끌어내는 문제적 작품으로 남는다. 그러니 앞에서 한 말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고백>이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친절하게 전달”한다고 했고 “누구나 되새겨야 할 보편적 가치를 따뜻한 어조로 말하는 성실하고 솔직한 영화”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백>이 굳이 꺼내지 않았던 질문을 정면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대담하고 선과 악의 판단에 관한 윤리적 딜레마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불편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경찰 지원은 보라와의 대화 속에서 사건의 진실을 눈치 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보라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고 지원은 보라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보라야, 나도 네 편이 되고 싶어. 그래도 될까?” 이 대사는 상대에게 진실의 고백을 권유하는 부드러운 제안처럼 보이기도하지만 ‘편’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으면 매우 섬뜩하게 다가온다. 보라의 대답 내용에 따라 즉, 대답의 진실 여부에 따라 보라는 더이상 지원의 ‘편’이 아닌 ‘남의 편’에 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백>은 누군가를 돕는 행위의 소중한 가치를 높이면서도 ‘기꺼이 도울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판단 앞에 관객을 서게 한다. 이때 찾아오는 난처한 감정과 고민이 <고백>의 진정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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