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발 자전거> / <거북이와 여자들> / <버드세이버 보고서 제2장>(2021 서독제 프로그램 노트)
외발 자전거 / 이종헌 / 2021
다라는 불쾌하고 이상한 일을 잇달아 겪는다. 아르바이트 면접 자리에서는 카페 사장이 괜히 꾸짖듯 짜증을 내고, 다라의 자전거를 훔친 (것 같은) 남자는 도리어 화를 낸다. 다라는 이 사람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종헌 감독의 <외발 자전거>는 핍진성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화다. 처음에는 언뜻 청년 세대의 고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곧 이어지는 부조리한 전개와 마주치면 작품의 목표는 ‘리얼리즘’과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미지는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다라의 표정과 몸짓이다. 기묘하고 위협적인 사건을 겪는 다라는, 그러나, 외부의 자극에 어떤 분명한 반응을 즉각 보이지 않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와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화를 속으로 삼킨다’ 같은 문장들과도 명쾌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다라의 표정에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는 걸음까지 더해지면 ‘다라’라는 형상 자체가 어떤 위축되고 마비된 마음의 상태를 시각화한 건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그러나 답의 실마리는 다시 검은 마스크 속으로 숨어 버리기에 지금으로서는 이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외발 자전거>의 독특한 개성이자 성취라고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북이와 여자들 / 한선희 / 2021
한선희 감독의 <거북이와 여자들>은 여성 삼대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던 한 남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딸과 손녀가 한자리에 모인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세 여성이 서로의 기억을 맞춰보는 가운데, 또 한 명의 여성이 이 자리를 찾는다.
많은 경우 누군가에 관한 개인적 기억은 시대의 풍경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거북이와 여자들>이 시도하는 것도 사적인 기억과 공적인 기억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들여다보는 연출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건 국가의 개입을 통해 만들어진 70~80년대의 아카이브 영상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감독은 신발 공장에서 일했던 남자의 과거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정부의 정책 홍보 영상을 삽입하고, 고통 속에 살았던 한 소녀를 기억하는 과정에서 80년대 “신발 아가씨 선발대회”의 기록 영상을 보여준다. 이 영상들은 희망과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찬 것 같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반대 지점에 놓여있다. 이 뚜렷한 몽타주를 통해 <거북이와 여자들>은 매끈하게 가공된 공적인 기억 속에 익명의 개인, 특히 여성들의 아픔과 희생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감독은 부모 세대의 이야기가 지금도 끝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밝히며 우리의 지금 현실까지 돌아보게 만든다.
버드세이버 보고서 제2장 / 최희현 / 2021
2020년 <버드세이버 보고서 제 1장>을 발표했던 최희현 감독의 새로운 작품은 전작의 문제 인식을 더욱 복잡하게 확장시킨 <버드세이버 보고서 제 2장>이다. 새들은 여전히 투명 방음벽과 빌딩의 유리에 비친 자연의 이미지를 현실로 착각해 죽어가고 있고, 사람들은 이를 막기 위해 이런저런 방안을 마련한다. 그리고 감독은 죽어가는 새들의 모습 속에서 ‘현실’과 ‘현실의 이미지’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유도한다.
그런데 ‘현실’과 ‘현실의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금방 또다른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현실 자체가 이미 이미지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우리 눈 앞의 저 많은 크고 작은 이미지와 이 안에 펼쳐진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떠올려보자. 결국 우리는 새들에게 눈 앞의 이미지가 현실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이미지와 현실이 깔끔하게 분리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까다로운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서일까, 감독은 전작보다 복잡한 구조의 프레임을 설계한 뒤 관객이 이미지들의 끝나지 않는 연쇄를 경험하게 이끈다. 하나의 이미지는 알고보니 또 다른 이미지의 일부였고, 그 이미지는 다시 다른 이미지와 교집합을 구성한다. 이런 기묘한 현실 속에 우리는 문득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영화 속 비둘기와 같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