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알렉산드르 도브젠코, 1932)을 봤다.
어떤 영화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반>은 그걸 파악하기 좀 어려웠다. 그리고 딱 그만큼 흥미로웠다.
영화의 주인공인 이반은 청소년이고 노동자이다. 그리고 훌륭한 프롤레타리아 꿈나무이다. 그는 더 훌륭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려 한다. 배워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반을 당에서도 물론 응원한다. 그리고 이반은 결국 대학에 가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정리하면 가난한 집안 출신의 청년이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굉장히 훈훈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교육을 장려하는 감동적인 프로파간다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이반이란 인물이 좀 기괴하게 느껴진다. 그는 마치 로봇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보이는 건 더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해 내 한몸 바치겠다는 의지 뿐이다. 대학에 가려면 가족과 고향을 떠나야 하는데 이반에게는 그에 대한 어떤 고민이나 슬픔도 없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아버지는 이반이 대학에 가는 걸 반대하며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펼친다. 아들과 떨어질 수 없고 가족이 중요하다는 그런 (지극히 당연한) 내용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며 도망치는 처지에 놓인다. 이처럼 아버지는 서사상에서 주인공의 앞길을 막아서고 볼셰비키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제일 ‘사람’처럼 보이는 인물이 바로 이 아버지다. 거의 유일하게 ‘내’가 느낀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멱살을 잡힐 때도 이반은 그냥 ‘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반이 주인공이면서도 어떤 감정 이입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이 클라이막스는 너무 이상해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즉 볼셰비키 프로파간다를 만들기 싫었던 도브젠코 감독이 완전히 작정하고 당이 요구하는 주제대로만 영화를 만든 뒤, 그 결과물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앙상한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상상.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 <이반>의 마지막 장면이 약간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셔츠와 넥타이를 맨 사람들로 가득한 대학 강의실. 뒤에서부터 남루한 옷을 입은 이반이 걸어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음악도 나름 희망찬 행진곡 풍이지만 이 장면에서 이반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고 그냥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보인다.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이반은 고향에서 댐 만들며 땀 흘려 일할 때가 훨씬 생동감이 넘쳤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