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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슬로프스키를 지금 막 만난 분들에게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1941~1996)는 199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수많은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고, 지금도 많은 관객들이 키에슬로프스키를 새롭게 만나고 있다. 아마 이번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특별전”을 통해서도 그의 작품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일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와 함께 후기작을 먼저 봤을 때 생길 수도 있는 선입견 세 가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참고로 이 선입견은, 부끄럽지만, 나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리한 것이다.

첫 번째 선입견 : 키에슬로프스키는 1980~90년대에 활동한 감독이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후기작을 떠올릴 것이다. 아름다운 포스터로도 유명한 “세 가지 색 연작”(1993~1994)이나 이렌느 야곱이 주연을 맡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그리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88),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1988)과 함께 만들어진 “데칼로그 연작”(1989) 등. 그런데 이 작품들의 제작 연도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에 걸쳐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대표작을 먼저 접한 관객들은 키에슬로프스키의 활동 시기 역시 80~90년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20대인 1966년에 일찌감치 데뷔해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포함해 사십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한, 굳이 구분하자면 다작을 한 편에 속하는 감독이었다. 1941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그는 십대 시절 바르샤바 연극 기술학교에 입학했으며, 연극팀의 분장실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태프>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후 영화에 관심을 갖고 폴란드의 우츠영화학교에 입학한 뒤 학창 시절 연출한 단편 <트램(Tramway)>(1966)으로 연출 필모그래피를 시작했고, 그 뒤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관객과 만났다.
   5분 길이의 짧은 데뷔작을 두고 이후 30년 넘게 이어질 거장의 작품 세계를 미리 예측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트램>은 키에슬로프스키 후기작의 몇몇 특징을 일찌감치 보여준다. 어두운 풍경 속의 사람들은 어딘가 피곤해 보이고, 카메라는 그런 등장 인물들에게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둔 뒤 가만히 관찰하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물의 마음 속에 작은 감정의 변화가 발생하는 순간 카메라는 과감한 클로즈업으로 그 인물의 표정과 눈빛을 스크린에 가득 채운다. ‘거리를 두고 관찰하기’와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라는 상반된 요소의 충돌, 또는 조화 속에 감독은 주인공의 흔들리는 마음 상태를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영화는 어떤 뚜렷한 결말을 제시하는 대신 관객에게 이후의 전개를 상상하거나 의미의 빈칸을 채울 여백을 남겨둔다.
   다소 뭉뚱그려 이야기했지만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하는 초-중기작인 <사진>(1969), <첫사랑>(1974), <지하도>(1974), <스태프>(1975), <평화와 평온>(1980), <어느 짧은 근무일>(1981)에서도 이런 특징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는)<트램>을 포함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초기작들은 그가 이미 60년대부터 자신만의 개성을 작품에 녹여냈던 창작자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 다시 말해 그의 60~70년대 작품이 없었다면 80~90년대 후기 대표작들은 지금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선입견 : 키에슬로프스키는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주제를 다루는 감독이다.
   “데칼로그 연작”과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통해 키에슬로프스키를 접한 관객이라면 그가 종교적, 또는 초월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는 감독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데칼로그 연작”은 제목부터가 기독교의 십계명을 테마로 한 작품이며,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현실의 논리로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 사건이 중심에 놓인 작품이다. 여기에 인간의 죽음과 구원의 가능성, 사랑의 조건과 그 한계를 질문하는 “세 가지 색 연작”까지 놓고 보면 키에슬로프스키가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보다는 인간 내면의 문제에 관념적으로 접근하는 데 더 힘썼다는 인상을 갖기 쉽다.
   물론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영혼이나 신, 종교라는 키워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감독의 이런 관심사가 동시대 폴란드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당시 1970~80년대 폴란드 사회의 풍경을 잠시 살펴보자. 1970년대 당시 폴란드 정부는 노동자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곤경에 빠트렸고 결국 노동자들은 1980년에 대규모 연대 파업을 시작한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함께 폴란드 사회는 변화하는 것 같았지만 1982년,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이후 약 5,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감옥에 갇히는 등 심각한 수준의 노동자 탄압과 인권 침해가 이어졌다. 시민들의 계속된 저항 끝에 1983년, 계엄령은 해제됐지만 이후 80년대 후반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할 때까지 폴란드 시민 사회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시기를 영화 감독으로 살아가며 시대의 아픔을 담은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70년대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마추어>(1979) 등을 포함해 이번 특별전에 상영하는 <평화와 평온>, <어느 짧은 근무일> 등은 70~80년대 평범한 노동자와 시민들이 사회의 어둠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숨김 없이 묘사하며 당시 폴란드 사회의 모순을 용감하게 고발한다. 또한 젊은 커플의 이야기를 통해 경직된 국가 시스템의 폐해를 간접적으로 그린 <첫사랑>이나 도시와 비도시 간 발전의 격차를 배경으로 한 <지하도> 같은 작품 역시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계가 폴란드의 구체적 현실에 발붙이고 있음을 알려준다.
   한 가지 더 짧게 언급하고 싶은 건 당시 키에슬로프스키가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그리지 않는다며 비판하는 평론가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수감 중인 노조 지도자와 그를 도우려는 한 여성이 등장하는 <끝없는>(1984) 같은 작품은 키에슬로프스키가 노동자의 ‘편’에 적극적으로 서지 않고 개인적인 문제만 다룬다는 비판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는 키에슬로프스키가 정치적 논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생각한다. 특정 사안에 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당장 제시하기보다는 시대가 만든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로 고민하는 개인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려 했던 감독의 이런 지향점은 “데칼로그 연작”을 포함한 후반기 작품에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세 번째 선입견 : 키에슬로프스키는 웃음기 없는 진지한 영화만 만든 감독이다.
   선입견이라고 했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 대부분은 웃음기 없는 진지한 영화인 경우가 많다. 딱딱한 표정의 (주로 남성) 주인공들이 불가항력적인 문제 때문에 괴로워할 때, 또는 타인의 아픔 앞에서 슬퍼할 때 그 영화들이 밝은 분위기를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감독의 작품 전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때문에 그가 마지막까지 잃지 않은 밝고 유머러스한 면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현실의 뒤틀린 면을 유쾌하게 풍자할 수 있는 감독이었고, 때로는 희망의 기운과 함께 해맑은 웃음도 그릴 수 있는 감독이었다. 이번 특별전의 상영작 중에서는 <데칼로그 10>과 <세 가지 색: 화이트>가 그 좋은 예이다. 잠정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어떤 우표를 둘러싼 형제의 다툼을 그린 <데칼로그 10>은 다른 데칼로그 시리즈와는 다르게 코미디 장르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도 감독은 예의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 대신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에 주목하며 돈에 눈먼 인간의 어리석음을 유쾌하게 풍자한다. 그러면서도 조롱으로만 일관하는 함정에 빠지는 일 없이 인물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끝까지 유지하는 점도 키에슬로프스키의 유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다. 블랙코미디의 색채가 조금 더 도드라지는 <세 가지 색: 화이트> 역시 키에슬로프스키의 유머 감각을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작품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돈이 없는 사업가가 절박한 상황 속에서 어떤 이상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폴란드와 유럽을 집어삼킨 자본주의가 부조리한 현실을 만들고 있다고 신랄하게 고발한다. 이때 감독이 택한 유머라는 수단은 폭로의 기능을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마주치는 순간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비논리적이고 어이없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비록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 웃음을 배치할 줄 알았던 감독이라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세 가지 작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글을 마무리하며 드는 생각은 키에슬로프스키에 관한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쓴 글이 또다른 선입견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걱정이다. 그는 거의 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발표한 많은 수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복잡한 세계를 만든 감독이었으며, 관객의 관점에 따라 매 순간 다른 면을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창작자였다. 나 역시 아직 못 본 작품이 본 작품보다 많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해서 그의 작품을 보며 미처 몰랐던 새로운 면을 찾아나갈 생각이다. 그때 나도 지금까지 몰랐던 또 다른 선입견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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