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티백 (황선영) “명랑하고 밝고 분위기 메이커인, 멋있는 사람이죠.” 출연자 중 한 명인 십대 소년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쑥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는 소개를 이어 나간다. “배달만 하면서 살아요.” 출연자들은 차례로 오토바이를 타는 재미와 사고의 아찔한 순간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감독은 오래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함께 기억한다. 황선영 감독의 〈씨티 백〉은 오토바이 배달일을 하는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영화다. 출연자들의 기억 속에는 위험한 행동도 있고 명백한 불법도 있다. 어쩌면 우리도 한 번쯤 그들을 길에서 보고 얼굴을 찌푸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삶을 쉽게 판단하는 대신 우리가, 즉 어른들이 왜 저들의 사연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는지, 왜 무관심으로 저들을 더 위험하게 했는지 ..

릴 전쟁: 샬랄 (카르니 만델) 감독이 말하듯, 아카이브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여기에 정치와 권력이 개입하면 당연한 명제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 〈릴 전쟁: 샬랄〉은 수천개의 필름릴을 보관한 이스라엘의 아카이브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중에는 20세기 중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자료가 있었고, 이스라엘 관계자들은 이 자료의 공개를 제한한다. 시민들의 일상을 기록한 단순한 영상도 그들에게는 불편했던 것이다. 〈릴 전쟁: 샬랄〉은 이 필름을 찾으려는 아키비스트의 노력을 보여주는 한편, 언뜻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단순한 영상의 존재 유무가 왜 그렇게 논쟁적인 문제가 됐는지 살펴본다. 나아가 영상 아카이브의 최초 생산 이후 이를 보존하고 다시 재생하는 작업이..

카트만두 몬순 (니마 겔루 셰르파) 처음은 가랑비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강아지와 놀고, 무지개는 하늘을 장식한다. 그러나 비가 점차 거세지기 시작하더니 거리는 곧 물에 잠긴다. 카트만두를 찾은 사람들은 엎드려 절을 할 수 없으며, 사람들은 흙탕물을 퍼내느라 바쁘다. 폭우가 바꾼 일상의 풍경이다. 〈카트만두 몬순〉은 어떤 나레이션이나 자막도 없이 카트만두의 비오는 풍경을 기록한다. 이 이미지만으로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읽는 건 쉽지 않다. 대다수의 장면들은 잔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촬영됐으며, 비가 많이 내리는 것도 네팔 우기의 평범한 풍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기후 변화로 가장 큰 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가 바로 네팔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 ‘일상적인’ 모습은 점차 심각해질 어떤 위기..

꿈을 뒤덮은 먼지 (스테파니 탕킬리산, 무하마드 파드리) 8분 길이의 짧은 다큐멘터리 〈꿈을 뒤덮은 먼지〉는 주류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는 현실, 그리고 우리가 굳이 찾아보지 않는 현실의 민낯을 정면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그 현실은 바로 인도네시아의 니켈 광산으로 감독은 폐허가 된 광산을 찍고,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을 인터뷰하는 기본적인 연출만으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강렬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니켈을 캐기 위해서는 땅을 뒤엎어야 하며, 그후에는 곧 산사태가 일어나고 바다가 오염된다. 또한 그 땅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외치며 전기차를 비롯한 배터리 산업 전반에 희망을 거는 동안 누군가의, 특히 가난한 국가의 삶의 터전은 회복불가능한 수준으로 망가지..

외발 자전거 / 이종헌 / 2021 다라는 불쾌하고 이상한 일을 잇달아 겪는다. 아르바이트 면접 자리에서는 카페 사장이 괜히 꾸짖듯 짜증을 내고, 다라의 자전거를 훔친 (것 같은) 남자는 도리어 화를 낸다. 다라는 이 사람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종헌 감독의 는 핍진성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화다. 처음에는 언뜻 청년 세대의 고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곧 이어지는 부조리한 전개와 마주치면 작품의 목표는 ‘리얼리즘’과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미지는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다라의 표정과 몸짓이다. 기묘하고 위협적인 사건을 겪는 다라는, 그러나, 외부의 자극에 어떤 분명한 반응을 즉각 보..

남원 추어탕 추어탕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사랑받는 음식은 아니다. 추어탕이란 말만 들어도 미끌거리는 미꾸라지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예민한 사람들은 특유의 냄새를 거북하게 느낀다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어탕 얘기를 하는 게 조금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서울아트시네마 가까운 곳에도 맛있는 가게가 있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서울아트시네마 맞은 편에 있는 남원 추어탕은 좁은 골목 안에 있지만 들어가보면 의외로 공간이 크다. 그리고 항상 사람이 많다. 그러다보니 아예 자리를 못 잡을 때도 있고, 혼자 먹기 조금 민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일단 주문에 성공하면 언제나 만족하고 나온다. 무엇보다 진한 추어탕 국물이 맛있고, 제피 가루도 취향껏 넣어 먹을 수 있고, 추어탕을 하나만 시켜도 맛보기 ..

키에슬로프스키를 지금 막 만난 분들에게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1941~1996)는 199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수많은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고, 지금도 많은 관객들이 키에슬로프스키를 새롭게 만나고 있다. 아마 이번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특별전”을 통해서도 그의 작품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일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와 함께 후기작을 먼저 봤을 때 생길 수도 있는 선입견 세 가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참고로 이 선입견은, 부끄럽지만, 나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리한 것이다. 첫 번째 선입견 : 키에슬로프스키는 1980~90년대에 활동한 감독이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후기작을 떠올릴 것이..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서서히 쌓이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2017년 2월 15일, 상영 후 김주혁 시네토크, 서울아트시네마) 한 사람의 배우는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가진다. CG나 특수분장을 사용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 조건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배우는 얼굴을 포함한 자신의 몸을 도구 삼아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체 그리고 그 신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라는 조건에서 자유로운 배우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연기를 통해 여러 이미지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건 가능하다. 선한 이미지의 연기를 주로 선보였던 배우가 지독한 악역을 성공적으로 소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는 자신의 이미지와 별개의 연기를 선보인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진 이미지의 영역을 넓..

볼 수 없는 영상 1. 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주인공의 직업이 영상을 보는 일이라는 설정이었다. 보험 조사원인 두원(이희준)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 문희(나문희)와 어린 딸을 홀로 보살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두원이 집을 비운 사이 어머니와 딸이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딸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혼수 상태에 빠지고, 어머니는 사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사건이 미궁에 빠져 경찰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자 두원은 어머니의 단편적인 기억과 함께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선다. 두원이 직장에서 주로 하는 일은 CCTV나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하며 교통사고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다. 그는 카메라의 영상을 수집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잘잘못을 가리거나 범인을 찾아낸다. 딸을 다치게..

불편한 질문: 보라는 정말 착한 아이일까? 의 이야기는 언뜻 매우 깔끔해보인다.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진범은 밝혀지고 이 과정에서 감독은 굳이 관객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 장르 문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미 이야기의 전말을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보라(감소현)는 아버지에게 오랜 시간 가정폭력을 당했고 보라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맞은 게 아니라 술에 취해 스스로 다친 것이며, 그를 의도적으로 방치해 죽게 놔둔 사람은 사회복지사 오순(박하선)이 아니라 딸 보라였다. 또한 오순은 이미 남자가 사망한 다음 현장에 도착했으며, 이 일로 보라가 불리한 상황에 처할까봐 경찰에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경찰 지원(하윤경)은 사건을 끝까지 조사해 이 진실을 모두 밝힌다.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