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들의 증언 - 노동운동 속에서 선구적인 여성들 / 하네다 스미코 / 1996 (1996)을 연출한 하네다 스미코(1926~ )는 전후 일본 영화사, 특히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만든 선구자로 평가받는 감독이다. 일찍이 (1958)를 연출하며 활동을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80편이 넘는 작품 제작에 참여하며 여성과 노동, 도시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중 (1996)은 일본 노동 운동 1세대 여성 활동가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물론 인터뷰이의 말 자체가 갖는 묵직한 무게감이다. 20세기 초 12살의 어린 나이에 공장에 취직해야 했던 기억, 노동 운동을 하면서도 기모노 걱정을 함께 해야 했던 씁쓸한 순간, 운동의 ‘발전’을 위해 누군가의 아내로..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 / 다무라 유미 / 1~6권(연재중) 소위 ‘순정 만화’의 예쁜 그림체를 갖고 있지만 꽤 끔찍한 사건들이 쉬지 않고 등장하는 추리 만화다. 왠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고 약간 눈치도 없어 보이는 천재형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사건 현장에서 멀뚱한 표정으로 사정 없이 진실을 파헤친다. 경찰을 비롯한 조연들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주인공을 견제하지만 나중에는 그의 도움을 받고 결국 친밀감까지 느낀다. 그리고 주인공은 변함 없는 태연한 표정으로 유유히 일상으로 돌아간다(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또 다른 사건과 마주친다). 사실 이런 설정과 전개는 많은 소설과 만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이 만화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요소는 적절한 거리감이다. 백수인 주인공이 사건과 만나..

어름치 (박세가, 다음 웹툰 / 송송책방) 를 좋아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림체도 정감이 가고 느릿한 전개 리듬도 좋고, 각양각색의 인물들도 다들 매력적이다.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이라 그런지 공사장 디테일도 신선하고, 은근히 빼곡하게 들어찬 썰렁한 유머도 좋다. 결말 뒤에 찾아오는 여운도 생각보다 크다. ‘노가다’라는 흔하지 않은 소재 특성상 언뜻 특별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맡은 임무를 완수하느라 땀 흘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시원섭섭한 개운함도 잘 녹아 있다. 이런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는 최근 본 만화 중 가장 좋은 인상을 남겼다. 또 하나 좋았던 건 ‘건강한 어른’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최근 창작물에서 근사한 기성 세대를 만나는 게 드문 일이 되어버렸는데, 의 실장..
모두와 함께 하는 즐거운 시네필 생활을 위해 - 을 보고 든 생각들 (뤽 물레, 1989)의 주인공은 시네필이다. 그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데이트를 미루는 사람이며, 항상 정해진 자리에서 하루에 두 세 편씩 영화를 보며,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만 최고라고 생각한다. 반면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독은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관객은 조롱과 함께 무시한다. 또한 극장의 영사 조건에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며, 어두운 극장 안에서 부지런히 메모를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을 우연히라도 만나면 괜히 부끄러워한다. 모든 시네필이 이 주인공과 똑같이 행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네필이라면 공감할 점이 최소 하나 이상은 있을 것이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 을 보며 나도 많이 웃으며 공감했지..

할머니 칼국수 요즘 익선동은 볼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든다. 5~6년 사이에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에 있던 시절, 익선동은 점심 먹고 잠깐 산책을 하기에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동네였다. 주민들의 개인 공간이란 느낌이 강했고, 무엇보다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지금 익선동은 사람이 살지 않는 시끄러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카페와 식당이 들어서더니 그 다음에는 옷가게가 들어왔고, 지금은 사진관과 오락실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새로 생긴 식당과 옷가게들은 밤에도 음악을 크게 튼다. 옛날에는 원래 있던 집의 형태를 유지한 가게가 많았다면 지금은 완전히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경우도 생겼다. 새로 생긴 가게들의 독특한 미적 감각은 차치하더라도, 나..

참 호도과자 호두과자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먹으려고 하면 은근히 파는 곳을 찾기 어렵다. 요즘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호두과자 가게가 하나둘 생기는 것 같지만 여전히 접근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서울아트시네마 근처에는 다행히 “참 호도과자”가 있다. CGV피카디리 쪽 대로변에 있으며 단돈 3,000원에 따뜻하게 개별 포장한 호도과자 열 개를 봉투에 담아준다.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종종 서비스로 호두과자 한 개를 더 주기도 한다. 호두과자의 효용성은 쉽고 분명하다. 따뜻하게 먹어도 맛있고 조금 놔뒀다가 식은 다음 먹어도 맛있으며, 일하면서 먹어도 손에 묻지 않는다. 한 입에 쏙 들어가고, 먹을 때 시끄러운 소리나 부스러기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아직까지 호두과자를 싫어하는 사..

낙원 보쌈 외식을 많이 하다보면 영양 불균형도 문제지만 정서적으로 메마르는 느낌 때문에 걱정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빵을 많이 좋아하는 나는 아무리 비싸고 좋은 빵을 먹어도 ‘제대로 된 한끼 식사’를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낄 때가 많다. 중국집에서 삼선짜장(그냥 짜장면이 아니라)을 먹거나 곰탕집에서 특곰탕(그냥 곰탕이 아니라)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맥락에서 좋아하는 가게가 피카디리 피맛골에 있는 “낙원족발”이다. 이곳에서 족발 정식이나 보쌈 정식을 시키면 간단한 나물 반찬 몇 가지와 된장 찌개와 계란 후라이를 기본적으로 준다. 사실 메인 요리인 족발과 보쌈은 양이 적은 편이지만 이 기본 반찬을 먹으러 종종 “낙원족발”을 찾는다. 된장 찌개에 든 조그만 두부 조각과 미리 구워 놓은 계란 후라이를 쌀..

미소야 없어진 식당에 관한 글을 쓰는 건 아무 소용 없는 일 같지만 짧은 기록 하나는 남아도 좋을 것 같다. 종로 미소야는 자주 가지 않았지만 항상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가게였다. 슬슬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할 때, ‘오늘 뭐 먹지?’하고 고민할 때 미소야는 항상 후보 중 하나였다. 특히 뭔가 든든한 음식을 먹고 싶을 때 미소야 생각을 자주 했다. 미소야에는 다양한 돈까스 메뉴가 있고, 무엇보다 미니 우동을 같이 주는 ‘돈까스 정식’ 메뉴가 있었다. 종종 허기가 찾아 오면 뭐든 다 먹을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기는데 그때마다 미소야는 매력적인 후보로 다가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소야를 찾는 건 열 번 중 한 번 정도였다. 미소야는 항상 손님이 많은 편이라 혼자 찾기 애매했고, 가격도 은근히 ..

이삭토스트(피카디리 앞) 서울아트시네마 근처에는 이삭토스트가 두 개 있다. 하나는 국일관 앞에 있고, 또 하나는 피카디리 앞에 있다. 둘 중 내가 주로 가는 곳은 피카디리 앞 이삭토스트다. 극장과 더 가깝고, 손님이 상대적으로 더 적어서 주문을 바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삭토스트에 관한 긴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그동안 이삭토스트에 시들했던 분들이 있다면 꼭 최신 메뉴를 확인해보길 권하고 싶다. 이삭토스트는 의외로 신메뉴 개발에 적극적이라서 거의 한 달에 하나씩 새로운 메뉴를 선보인다. 최근에는 소세지를 넣은 토스트도 나왔고, ‘리챔’을 넣은 메뉴도 나왔다. 나는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의 신메뉴를 맛 보는 걸 좋아해서 일부러 이삭토스트를 정기적으로 찾는다. 극장에서 먹다보면 항상 내용물이 밖으로..

밀: 끼니 요즘은 워낙 맛있고 개성 넘치는 빵집이 동네마다 많아 웬만해서는 ‘빵 맛집’ 소리를 듣기 어렵다. 국일관 맞은 편에 있는 『밀: 끼니』도 이런 맥락에서는 특별한 주목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가게 자체가 많이 낡았고 메뉴 구성도 소박한 편이다. 한눈에 예뻐 보이는 알록달록한 디저트를 팔지 않아 유행에 뒤쳐졌다는 느낌도 들며, 작업 공간과 판매 공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살짝 어수선하기도 하다.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싶으면 바로 옆의 『카페 뎀셀브즈』, 더 선명한 개성의 빵이 먹고 싶으면 조금 걸어서 안국쪽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밥보다 빵을 많이 먹는, 그리고 종로가 직장인 나 같은 사람에게 『밀: 끼니』는 정말 고마운 곳이다. 이곳의 빵은 다들 큼직큼직하고 속이 꽉 차 있어서 하나만 먹..